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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대, 사이버대, 원격대 과제

서유럽 봉건제와 근대적 행정체제 형성

by GLAMOROUS PENGUIN 2023. 5. 2.

서유럽 봉건제와 근대적 행정체제의 형성에 대해 살펴보겠다.

로마제국의 붕괴와 뒤이은 봉건제는 정부행정의 개념을 훼손시켰으며 최소한의 수준인 공적 서비스의 제공까지 줄이는 결과를 야기했다.

 

1. 서유럽 봉건제

 

서유럽의 봉건제도는 고대의 노예제 사회의 붕괴과정 및 씨족체계의 해체과정이 서로 관여하며 발생한 것이다. 로마제국을 정복한 부족은 공동체가 공동으로 산림을 이용하고 경작지의 경우 개인이 전유하는 촌락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러한 농업공동체에서 개인이 토지와 생산을 소유하게 되자 부의 불평등이 생겨났다. 부유한 공동체 성원이 점차 수적으로 성장했으며 이들 중 스스로 왕이 되어 측근에게 획득한 토지를 나누어준 후 그 대가로 군사적 반대급부를 요구했다.

이를 '레헨'제도라고 하는데 이 제도가 농노제와 결합하면서 봉건제가 성립되었다. 

 

봉건사회에서는 군주가 가신에게 봉토를 사용하게 빌려주는 레헨제도를 매개로 하여 군신간의 충성과 보호관계가 형성되었다. 군주는 가신에게 봉토를 수여하고 보호하는 대신에 가신은 군주에게 군사력을 제공하며 충성을 다한다.

민병대에게는 녹봉지를 부여했는데 민병대는 녹봉지에서 얻는 지대로 기마를 구하고 무장해서 군사적으로 군주를 지원했다.

 

 

이러한 기원을 갖는 봉건제도는 국왕 - 봉건영주 - 하급영주 - 기사 - 농민으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형태의 지배자 계급을 통해 정치질서를 구성한다. 특히 봉건영주의 경우 왕으로부터 직접 수여받은 토디를 보유하는 영신들인데 일한 위계질서는 중세시대의 가톨릭 교회조직과 유사하다. 이에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질서가 봉건사회의 질서 형성의 원리로 작용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봉건영주는 국왕의 가신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도 많은 가신을 두어 사실상 독립국가를 이루었다. 이러한 봉건영주를 제후라고 하며 중세의 봉건시대는 통일된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봉토마다 통치행위가 분권적으로 이루어졌다.

봉건제는 경제외적 강제, 지배의 분권화, 영주들 간의 봉신관계, 영주가 농민을 사적으로 지배하는 농노제와 같이 복합적인 것들이 구조화된 총체이다.

 

2. 서유럽 봉건제의 특징

 

서유럽 봉건제의 특징은 유럽의 근대사의 특수성을 결정짓는 요인이 되는데 그 특징은 두가지가 있다.

 

 

첫째, 고대 로마법의 사적 소유권 개념과 절대주권에 대한 관념이다. 이러한 고전문명의 유산은 중세시대 동안 수면 아래에 잠재해 있다 근대 초 르네상스 시대에 부활해 유럽 자본주의의 발전과 절대왕정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둘째, 서유럽 봉건제의 상부구조의 특성으로 비유럽세계와 달리 유럽세계는 자본주의를 성공적으로 이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부구조적인 특성 중 통지권의 분산이 결정적으로 중요했으며 통치권이 파편회되었기 때문에 그 틈에서 중세도시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봉건제의 기본적인 특징을 토지에 대한 귀족의 사적 소유, 귀족에 의한 농민의 군사적 보호, 법적인 농노제 등으로 보았다.

 

가산제 관료에서는 지배자가 군사기구 및 행정기구에 자신에게 종속된 사람을 배치하며 이들에 대한 통제력은 지배자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범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즉, 보수를 지급할 수 있는 여력 내에서 이들에 대한 통제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배할 영토가 넓어지게 되면서 넓은 영토를 관리하는 것이 비효율적으로 될 수 밖에 없었고 가산관료들은 지배자의 통제와 감시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한편 지배자는 지배영토 확대에 따라 여러 형태의 녹봉지를 관료들에게 지급하게 되었다. 하지만 녹봉지가 세습재산이 되면서 지배자는 통제권이 약화되었으며 그 결과 관료들은 지배자의 통제에서 멀어질 수 있었고 세습할 수 있는 녹봉지는 늘어났으며 공적 권력이 사적 권력으로 대체되게 되었다. 

 

중세에는 성직자와 귀족을 중심으로 관료계층이 이루어졌지만 근대 행정체제의 수립에 따라 관료는 법률을 공부한 귀족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보수지급이었으며 봉건제하에서는 정기적으로 화폐보수를 지급하는 여력이 안 되었으나 그렇다고 종래처럼 봉건적 지대로 주는 것은 중앙권력의 약화를 초래하기 떄문에 따를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 군주 대부분은 관료가 관직의 사적인 전용을 허용하게 되었는데 특히 관료가 행정비용을 부담하는 경우 관직의 사적 전용에 대해서는 어떠한 제약을 두지 않았다. 18세기 말까지 관직매매가 보편화되었던 프랑스가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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